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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사진관 : 2화

  • 신은별
  • Apr 13, 2016
  • 5 min read

어쩌면 나는 제대로 길을 잃은 것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이내 언제나 그랬듯 오히려 그 생경한 모습에 나는 알 수 없는 자신감에 사로잡혔다. 그것은 자신감이라고 부르기도 했고, 나 혼자 덩그러니 남겨질 때면 어김없이 내 마음을 비집고 나오던 본성이기도 했다. 이렇듯 평소의 나를 관찰하는 시선이 모조리 사라졌을 때면 어김없이 유년시절의 개구쟁이 소년이 등장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 어린 소년에게 이끌려 어둠에 잡아먹힌 구불구불한 계단을 거침없이 밟아 내려갔다. 그건 낯선 상황만 마주하면 몸이 움츠러드는 나의 소극적인 심성을 떠올려보면 꽤나 대범한 일이었다.

행선지도 모른 채 한참을 걸었을 때, 나는 어느 마을의 조그마한 소광장에 서 있었다. 막다른 골목이었다. 소년은 이미 어딘가로 사라진 뒤였다. 뒤늦게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주변에 눈에 띄는 것이라고는 아이들이 놀이하다 내팽개치고 갔을 나뭇가지와 장난감 따위밖에 없었다. 안타깝게도 길을 알려줄 만한 것은 하나도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그때, 허름한 판잣집들 사이에서 한 간판이 눈에 띄었다. 밝아봤자 회색, 갈색이 전부인 동네에서 밝은 초록색 간판이 유난히 튀었다. 게다가 그럴듯한 상호도 있었다.

‘서울사진관’

거기까지 살피고 보니 갑자기 희망이 샘솟았다. 친절한 도움의 손길까지는 아니더라도 간단한 길 안내 정도는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나는 자세히 살펴볼 겨를도 없이 서둘러 다가가 사진관 안에 발을 들여놓았다.

“계세요?”

낡은 외양과는 다르게 내부는 깔끔했다. 창문에 초록색 암막 커튼이 드리워져 빛이 거의 들어오지 않는 바람에 자세히 보이지는 않았지만 생각했던 것보다는 평범한 모습이었다. 좁은 공간임에도 불구하고 웬만한 것은 다 있었다. 한쪽 벽장을 가득 메운 책부터 푹신해 보이는 갈색 가죽 소파, 커다란 흔들의자, 그리고 그 위에 놓인 담요가 분명 사람이 산다는 흔적을 이곳저곳에 남겨놓고 있었다. 그러나 그 어디에도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당시의 나는 놀랍게도 기분이 매우 좋은 상태였다. 한동안 집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 같다는 예감에 망연자실하기는커녕, 오히려 알 수 없는 개운함을 느꼈다. 물론 나는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충분히 감상적인 사람이지만, 그 순간의 기분은 인간성이나 심리적 예민함 같은 그런 단순한 것으로 설명할 수 없는 그런 것이었다. 생전 처음 느껴본, 겉잡을 수 없을 만큼 부푼 가슴을 진정시키기 위해 나는 재차 눈을 꾹 감았다가 다시 뜨기를 몇 번이나 반복했다.

그러나 지금 돌아보면 서울사진관의 첫인상이 유난히 특별하게 느껴진 것은 복잡하고 변덕스러웠던 나의 심경 때문만은 아니었다. 처음 보는 신기한 촬영 기구와 별난 장식품들 때문도 아니었다. 사진관에 들어서자마자 내가 느낀 묘한 기분은 바로 이곳이 사진관이라는 사실에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나는 그 정체 모를 위화감이 어디서 왔는지 깨달았다. 그곳은 분명 가장 중요한 한 가지를 잃어버리고 있었다. 백번 양보해서 내가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에 빠진 것일지도 몰랐지만, 어쨌든 사진이 단 한 장도 걸려있지 않은 사진관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어렵지 않을까 싶었다. 잠시 궁금증에 빠져있던 나는 곧 작업실 한편에 놓인 칸막이를 발견했다. 촬영을 위한 공간으로 따로 만들어둔 것인지 큼지막한 검은색 천이 테이프로 고정되어 기다란 석고벽을 가로막고 있었다. 나는 피곤함도 잊은 채 다시 탐험에 나섰다.

나는 조심스레 칸막이를 지나 촬영 장소로 추정되는 공간에 들어갔다. 넓게 봐주어 봤자 3미터 남짓 되어 보이는 어둡고 자그마한 공간이었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나’라는 개인을 위한 사적인 공간 같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나의 관심을 이끈 것은 그 안에 말없이 우뚝 서 있던 검은색 기계였다.

사실 그것은 특별할 것도 없는 아주 낡은 사진기였다. 그러나 이십 년 평생 내가 구경해본 적 없는 독특한 모양새의 사진기라는 점에서 아주 특별했다. 물론 삼각대 위에 얹어진 디지털카메라 따위는 아니었다. 전문가용 DSLR 카메라는 더더욱 아니었다. ‘카메라’라는 편리한 외래어를 두고 굳이 ‘사진기’라는 말을 사용하고 싶었던 이유 역시 바로 그 수상한 생김새에 있었다. 웬만한 성인 남자의 키만 한 덩치를 자랑하고, 스위치나 버튼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아 대체 어떻게 사용하는 물건인지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였다. 다만 벽을 향해 있는 동그란 원형 유리 렌즈만이 그것이 카메라 비스름한 물건이라는 것을 짐작하게 했다. 나는 한동안 자세히 그 물건을 살펴보았지만 좀처럼 기계의 작동방법은 알아낼 수가 없었다. 단서는 아마도 사진기일 것이라는 짐작뿐. 그렇게 기계를 잡고 끙끙댄 지 한참이 지났지만, 여전히 나는 그것을 사용할 수 없었다. 어쩌면 애초에 사진기 따위가 아닐 수 있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것이 사진기일 것이라는 이유 모를 무조건적인 믿음이 좀처럼 가슴 속에서 떨치지 않았다.

그때, 서서히 지쳐가던 목을 풀기 위해 고개를 좌우로 돌리던 나의 시야에 전에는 보지 못한 것이 잡혔다. 벽을 등지고 있는 작은 나무 의자였다. 사진기가 위치한 반대편에 버젓이 놓여있는데도 불구하고 별 존재감이 없어서였는지 뒤늦게야 발견한 것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상한 점이 없었다 하기에는 또 석연찮은 점이 많았다. 존재감이 없으면 없었던 것일 텐데, 왠지 모르게 그 의자에 자꾸 눈길이 갔다. 실은 기계를 정면으로 마주 보고 있다는 사실이 가장 마음에 걸렸다. 나는 잠시 망설였다. 그러다가도 스스로 망설일 이유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허둥지둥 의자에 앉았다. 나 자신이 하는 꼴이 퍽 우스워 허허로운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러나 잠시 후, 사실 그 순간에도 나는 믿고 싶지 않은 사실을 부정하고 있었던 것일 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자리에 앉는 순간, 사진기라 믿었던 그 굳건한 몸체에서 기다렸다는 듯 번쩍, 하고 빛이 뿜어져 나오는 게 아니겠는가.

셔터가 터지는 순간 눈이 멀 듯 환하게 쫴대는 플래시의 빛과 렌즈에 비친 멍한 내 얼굴을 나는 믿을 수가 없었다. 아니, 이렇게 간단한 방법일 줄이야! 처음에는 그 메커니즘을 이해하기가 어려워 잠시 의아하기는 했지만 분명 화면에 얼굴이 비치면 찍히는 특수 기능이라든지, 의자에 무슨 리모컨이라도 달렸으리라 하는 막연한 생각이었다. 어떤 면에서는 조금 마법 같기도 했다.

아이고, 하다 하다 이제는 마법이라니.

나는 잠시라도 그런 생각을 한 나 자신을 야멸차게 비웃어주었다. 그리고 내가 마음속으로 무슨 자기 비하 비슷한 것을 하고 있던 그 순간에도 사진기는 연속적으로 나를 촬영하고 있었다. 한 스무 장쯤 찍혔을까? 한바탕 거하게 찍힌 후에야 사진기는 나를 놓아주었다. 멈추는 법을 몰라 가만히 빛을 맞고 있어서인지 눈이 따끔했다. 그때였다.

“다 찍으셨나 보오?”

갑작스레 뒤에서 등장한 낯선 목소리에 나는 화들짝 놀라 그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진중한 듯 어딘가 장난스러운 목소리의 주인공은 한 노인이었다. 꽤 높은 톤이었지만 위태로운 기색이 전혀 없이 어딘가 강인하고 굳센 구석이 있어서, 뒤를 돌아보기 전까지는 백발이 무성한 노인이라는 것을 전혀 짐작할 수 없을 정도였다. 순간적으로 그를 흝어본 나는 잠시 어떻게 이 상황을 설명해야 할 지 고민하다가 짧은 대답을 택했다. 그도 그럴게, 주름이 자극하고 눈매가 날카로운 노인의 외양은 마음 편히 계속 바라보고 있기에는 왠지 모르게 간담을 서늘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제야 후회가 물밀듯 밀려 들어왔다. 이건 말이 좋아 구경이지 집으로 치면 주거침입죄, 사업장이라 해도 업무방해죄였다. 여직 정류장에서 기다리고 계실 텐데. 이런 생각이 들자 절로 다리에 힘이 풀리는 것이었다. 그저 어서 이곳을 벗어나 부모님을 뵙고 싶었다. 희한하고 낯설지 그지없는 상황에 나는 잔뜩 움츠러들어 말했다.

“아…. 안녕하십니까, 어르신.”

정중한 인사에도 노인은 그러거나 말거나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나야 항상 안녕하지. 그나저나 처음 보는 상판인데. 여기는 어쩐 일이라우?”

“그만 길을 잘못 들어서….”

“길?”

착각이었을까? 그 순간, 그의 주름진 얼굴에 잠시 알 듯 말 듯한 웃음이 스치는 것을 본 것만 같았다. 그러나 내가 그것을 생각해 볼 겨를도 없이 노인이 단조롭게 답했다.

“에잉, 이 코딱지만 한 동네에서 잃을 길이 어디에 있다구 그래.”

“예, 어르신. 제가 이곳으로 이사를 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요. 혹시 버스 정류장으로 가는 길을 물을 수 있을까요?”

노인은 대답 없이 침묵했다. 그것도 한참동안 대답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내가 한 질문이 그토록 어려운 것이었던 가 잠시 고민해야 했다. 그냥 무시하고 싶었던 걸까, 라는 생각도 했다. 다시 보니 그는 어딘가 골똘히 생각에 잠긴 것도 같았는데, 내가 궁금증을 채 풀어내기도 전에 노인이 입을 열었다.

“정류장? 잘 모르겠소만.”

“예?”

그게 말이 됩니까? 하고 소리를 지르려던 것을 나는 목구멍 너머로 겨우 삼켜내었다.

“아아, 바로 근처에는 버스 정류장이 없나 보군요. 그렇다면 조금 멀더라도 가장 가까운 것이 어딘지….”

“그러니까 그 버스 정류장이라는 것이 무엇인교?”

잠시 침묵이 흘렀다. 나는 황당함을 감추지 못하고 노인에게 대꾸했다.

“저기, 농담이시죠? 버스 아시잖아요. 대중교통이요.”

“허, 참. 글쎄. 당최 무슨 얘기인지 모르겠소. 보아하니 사정도 딱해 보이는데, 내가 알아듣게 이야기해 보게. 내가 이래뵈도 동네 마당발이라오. 말만하면 금방 찾아주지.”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일까?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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