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랑말랑 책다락방: 두 번째 편지
- 신은별
- Dec 13, 2015
- 3 min read

봄바람 / 박상률 저 / 사계절 / 216p
말랑말랑 책다락방, 그 두 번째 이야기입니다. 뜬금없게도 봄기운이 만연한 사진이 눈에 들어와 당황스러우셨을지도 모르겠네요. 하기야, 스포츠가 그렇듯 문학에도 때와 계절이 있기 마련인데 한겨울에 ‘봄바람’이라니… 이 무슨 동계 올림픽에 수영하는 소리랍니까.
요즘 들어 더욱 매서워진 바람 탓에 봄이 그리웠던 걸까요? 자세히는 몰라도 제가 다시 이 책을 집어 들게 된 이유는 아마 그런 비슷한 이유가 아닌가 싶습니다. 이것도 일종의 그리움이라 할 수 있다면요.
물론 이번에도 저의 취향이 99퍼센트 반영되어 있습니다마는… 그래도 첫 회부터 소설이랍시고 무거운 내용의 책을 들고 나타난 저의 불찰을 만회하기 위해, 이번에는 정말 ‘재미있는’ 책을 가져와 보았습니다. <봄바람>은 책의 무게도 훨씬 가벼울뿐더러, 읽을 때마다 새롭게 발견하는 즐거움이 있는 책입니다. 제가 겨우 갓 태어나 눈만 끔뻑 뜨고 있던 1997년에 첫 출판 되었다 하고, 존재하지도 않았던 1970-80년대를 배경으로 했음에도 불구하고 2012년 재판본 표지에 떡 하니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성장소설이라 표기해놓은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법이지요. 저는 그 고의적인 시대착오에 오히려 기분이 들뜨고는 합니다.
음, 이건 순전히 저의 촌스러운 취향 탓일지도요.
제목에서 짐작 가능하셨을지도 모르지만, 첫 장을 펼치는 때부터 마지막 장을 넘기는 순간까지 이야기는 주인공 훈필이의 시점에서 바라보는 그의 ‘봄바람’에 대한 회상 위주로 진행됩니다. ‘봄바람’이라는 제목 자체가 소설 내의 일종의 이디오그램 (특정한 견해나 생각을 간접적으로 나타내는 무/유형의 상징물. 심볼리즘과 비슷한 개념)으로써 작용하며 주제로 완성됩니다. 이는 작가의 삶 혹은 주인공의 삶에 대한 자세를 잘 보여줍니다. 삶의 순간순간을 되돌아보는 시간이자 즐거웠던 추억, 괴로웠던 일들, 동경했던 사람 등 모든 기억을 포괄하는 향수 어린 존재이지요. 여기까지 보면 이 소설이 왠지 심오하고 철학적이게까지 느껴지지만, 결코 어렵지는 않습니다. 우선 소설의 첫 줄과 마지막 줄에서 앞뒤로 반복되는 말만 보아도 ‘바람이 불어왔다. 봄바람이다.’라는 중복되는 구절을 사용하여 어쩌면 노골적일 정도로 제목의 의미를 선명하고 일차원적인 방법으로 독자에게 되새겨주고 있는데요. 이는 청소년 독자를 고려하여 만든 방법인지 아니면 작가 특유의 문체인지는 알 수 없어도 그다지 머리 아프게 생각할 필요 없이 편안하게 읽힙니다. 조금 김이 샐 정도랄까요.
사실 이러한 문학은 자칫하면 생각의 여지를 줄여 독자에게 큰 인상을 남기지 못할 위험이 있지만, 그에 대한 대비책으로 <봄바람>은 ‘서정성’과 ‘보편성’이라는 좋은 카드를 지니고 있습니다. ‘청소년기’의 사소한 고민과 깨달음, 꿈, 일탈과 같이 시대를 불문하고 공감을 얻을 수 있는 보편적인 주제에 의문의 러브스토리를 기분 좋게 섞어 독자에게 다가갑니다. 투박한 사투리에서 배어나는 특유의 향이 과거에 존재했을 어느 날들을 생생하게 보존하고, 때 묻음 없이 맑은 미소가 마치 시어와 같이 이야기를 섬세하게 그려나갑니다. 이제는 희미하다고는 하지만, 한때 아버지의 손을 잡고 만난 당신의 오디 나무라든지, 어머니가 볏짚 냄새를 맡으며 새끼줄을 꼬았던 시골 고향 집을 떠올리게 하는 장면들을 보다 보면, 꼭 제 부모님이 어릴 적에 쓰셨다던 낡은 일기장을 엿보는 것만 같은 기분입니다.
사실 보편성은 다른 매체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요. 이에 가장 대표적인 예가 T 방송국의 ‘응답하라’ 시리즈입니다. 주요 관람자의 연령층이 겨우 10대에서 20대를 웃돌면서도 1997년과 1994년, 그리고 1988년을 차례로 재현하며 폭발적인 인기를 얻은 이 드라마의 성공 비결이 바로 모든 연령층에 어필할 수 있는 이야기를 만들어 냈다는 것이죠. 여기서 우리는 누군가의 지난 삶의 모습을 들여다보는 이야기는 언제나 대중에게 사랑받는다는 것을, 그리고 그 속에 존재하는 ‘휴머니티’를 자극하는 작품은 성공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닫습니다. 훈필이라는 순수한 시골 소년에게 ‘꽃치’라는 동경의 대상을 새로이 심어주었을 때, 그의 마음속에 수 놓인 귀여운 호기심과 고민이, 그 속에서 뿜어져 나오는 깨끗한 에너지가 독자로 하여금 절로 미소를 짓게 하는 것과 같지요.
꽃치는 정말이지 모르는 노래가 없는 것 같았다. 우리가 학교에서 배운 동요부터 시작해서 민요, 판소리, 타령, 유행가에 이르기까지 그는 마음만 먹으면 어떤 노래든 다 부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의 노래는 그의 말이다. 그의 노래는 그의 삶이다. 그러니 입만 열면 그때 그떄 필요한 노래, 적당한 노래가 막 터져 나오는 것일 게다. 아무튼 나는 그가 부럽다. 그의 노래가 부럽다. 그러나 그처럼 살 자신은 없다. 그의 노래처럼 살 자신도 없다. 그렇다면 나는 장가들 때 까지 노래를 배울 기회가 영영 없는 것일까?
<봄바람>, 128쪽에서
흔히 허구성, 진실성, 서사성, 산문성, 교훈성, 그리고 예술성이라 하면 달달 외우기만 했던 것들인데, 그것들이 그대로 구현된 것이 어쩌면 이 <봄바람>이라는 소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정말 ‘소설’이라는 장르의 역할에 가장 충실한, 기본을 갖춘 글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어디선가 들어본 것만 같은 이야기라 뻔하다고 생각되실지도 모르겠지만, 글쎄요. 한 번이라도 다시 들여다보시길 권합니다. 그 안에서 또 다른 의미를 찾게 될지도 모르니까요. 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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