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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랑말랑 책다락방

  • 신은별
  • Nov 25, 2015
  • 3 min read

벌써 11월입니다. 찬 바람이 들이닥치는 제주도의 겨울은 우리에게 어딘가 서늘하고 공허한 기분을 안겨주고는 홀연히 사라지지요. 처음 제주땅을 밟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느낀 그 이름하기 어려운 기운을 저는 단순히 섬이라는 지리적 특성 탓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밟고 있는 이 땅 아래 서린 빛바랜 원한과 눈물에 대해 배운 것은 그로부터 한 참 후의 일이었지요.

저는 얼마 전 방학을 맞아 집을 들러 오랫동안 책장에 묵혀두었던 책 한 권을 꺼냈습니다. 그리고 개학 직전 하룻밤을 제주도에 머무르며 이 책을 읽었지요. 장편소설임에도 불구하고 반나절 이내에 훌쩍 다 읽어버렸습니다. 소설의 배경은 1910년대에서 1960년대까지의 대한민국. 일제강점기는 물론이고 거의 50년 가까이 되는 시간을 그린 소설인지라 책의 두께 역시 꽤 묵직했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한 여자의 일생을 통째로 담은 소설이더군요. 사실 이 소설이 처음 발간된 2010년은 소위 ‘마이너’라 불리는 비교적 잘 알려지지 않은 실존 인물들을 주인공으로 한 역사 팩션이 유행을 하기 시작하던 때였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소설 ‘왕자 이우,’ 그리고 ‘덕혜옹주’였지요.

고백하건대, 저는 참 쉬운 독자입니다. 원래 글이라면 책, 안내문, 책자, 심지어 포장지까지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읽는 터라, 어릴 적에는 좋은 글, 나쁜 글을 가려 읽을 줄 몰랐었죠. (어머니 말씀으로는 저희 어머니 쪽 조상님으로부터 대대손손 전해져 내려오는 ‘활자 중독증’이라는 것이 있다고 하는데, 과연 믿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사실 처음에는 ‘덕혜옹주’ 역시 자극적인 배경으로 독자의 흥미를 끌어보려는 의도가 없지 않다 생각했지만, 저는 순순히 그 술수에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우스갯소리처럼 이야기는 했지만, 저의 호기심도 충동적인 선택에 한몫했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제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바로 책 뒷날개에 쓰인 짤막한 작가의 말이었는데요. 책의 저자이신 권비영 씨는 오랜 무명 생활을 거치며 반쯤 글 쓰는 일을 포기하셨다가 어느 날 우연히 사람들에게서 잊힌 한 황녀의 삶을 만난 후로부터 다시 창작의 고통을 감내하기로 마음을 굳게 다잡게 됩니다. 사연이 어찌 되었든 타인의 삶을 서술한다는 것은 그만큼 그 대상에게 애착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인데, 태조도, 광해군도, 고종황제도 아닌 이름도 잘 알려지지 않은 황녀에게 작가는 대체 어떤 마음을 품게 된 것이었을지가 궁금했습니다. “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이야기”였다는 작가의 말이 그저 예쁘게 포장된 이야깃거리일지, 아니면 진심 어린 고백일지 알아보고 싶은 마음이 컸지요.

어조는 특별한 미사여구 없이 담담하고, 자칫 단조롭게 느껴지기까지 합니다. 주인공인 ‘덕혜’ 역시 무채색에 가까운 조용한 여자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손을 뗄 수가 없습니다. 소설의 궁극적인 목적은 여자로서, 인간으로서 안타까운 삶을 살았던 여자의 이야기로 인간적인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것뿐만 아니라, 이를 통해 가슴 아픈 식민지의 역사를 재조명하고자 하는 데에 있습니다. 하지만 결국 ‘역사’란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역사책에 한 줄, 혹은 한 문단으로 서술되는 역사는 전반적인 사건의 흐름은 보여줄 수 있어도, 그 당대를 살아온 이의 고달픈 삶을 들여다볼 때서야 우리는 비로소 그 진실한 얼굴을 마주하게 되는 것이지요. 역사 속 덕혜옹주는 고결하고 아름다운 일국의 공주였지만, 소설 속 ‘덕혜’를 보면 결국 그녀도 고작 한 여인일 뿐이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녀가 견뎌내고 맞서 싸워야 했던 모든 것들… 가족과 나라를 잃은 상실감과 상대적 박탈감, 알고도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허망함과 죄책감, 사람들의 시선, 남편의 외면, 심지어는 배 아파 낳은 딸 아이의 증오 어린 시선까지. 그녀 홀로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벅찼던 지독한 삶의 현장을 소설은 시와 같은 언어로 고스란히 풀어냅니다. 하지만 이 소설이 덕혜옹주라는 특정 인물을 위한 것만이 아닙니다. 나라를 잃고, 가족을 잃고, 또 나의 이름을 잃는 고통을 안고, 그 상처가 곪을 때까지 끙끙 앓았던 당시의 모든 이들의 목소리를 담은 회고록이자, 구슬픈 위로의 노래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녀의 삶은 우리가 살고 있는 아름다운 섬을 놀라우리만치 쏙 빼닮아 있습니다. 감히 비유해 보자면, 홀로 쓸쓸히 외딴 섬에 서서, 빛바랜 가족사진을 품에 안고 휘청이며 춤을 추는 여인– 혹은, 마치 다 타버린 장작 속에서도 고고하게 빛나는 검은 재와 같습니다. 제주와 덕혜. 둘 다 아픈 역사를 안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기 때문일까요? 그들은 고요하고 말이 없지만 뜨겁게 타오르는 거대한 숲과 같습니다. 그것은 쓸쓸한 잔향으로 남아 소용돌이처럼 돌고 또 돌아, 온 섬을 휘감아 올리고, 마침내 산들바람을 타고 우리의 품에 안기지요.

전반적으로 읽기가 편안해서 오랜만에 읽는 재미를 느끼게 해준 소설이었습니다. 하지만 몇 가지 아쉬운 점도 있었는데요. 저는 추리 소설 마니아인만큼 소설 내에 풍기는 수상한 ‘냄새’를 즐기는 편인데, ‘덕혜옹주’의 도입부의 경우 상황에 대한 구체적 서술이 부족하고 전개가 급하다 보니 추리 소설의 탈을 뒤집어쓴 듯 어색한 느낌이 강합니다. 차라리 에필로그와의 수상스러운 연결을 포기하더라도 그냥 그 둘을 합쳤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다소 남습니다. 그렇지만 다행히 바로 뒤를 이어 나오는 내용은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고 정말 막힘없이 읽힙니다. 혹시 책의 내용이 어려울까 걱정이실까 해서 덧붙이자면, 한국 근현대사에 대한 기본적인 배경지식 (중학교 수준)만 있으셔도 충분히 이해가 가능하실 것이라 봅니다.

추가로, 내년 즈음에 해당 소설을 바탕으로 한 영화 ‘덕혜옹주’가 개봉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부디 소설만큼만 만들어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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